벌교 취송정 소나무 향으로 물든 늦여름 고즈넉한 정자
벌교읍 들판을 가로질러 취송정을 찾았던 날은 늦여름의 오후였습니다. 하늘은 옅은 구름이 드리워져 있었고, 멀리서 들려오는 개울물 소리가 잔잔하게 배경이 되었습니다. 작은 언덕 위에 서 있는 정자는 나무 그늘에 반쯤 가려 있었고, 그 아래로는 푸른 논이 끝없이 펼쳐졌습니다. ‘취송정(翠松亭)’이라는 현판이 푸른빛의 단청 아래 또렷하게 걸려 있었는데, 이름 그대로 ‘푸른 소나무 정자’라는 뜻이 이곳의 분위기를 잘 담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기둥 사이로 소나무 향이 퍼졌고, 오래된 나무들이 정자를 감싸 안듯 둘러서 있었습니다. 그 안에 서 있으니 세월이 느리게 흐르는 듯했습니다.
1. 벌교읍에서 정자로 향하는 길
보성군 벌교읍 중심에서 차로 5분 남짓, 벌교천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 ‘취송정’ 표석이 보입니다. 좁은 농로를 따라가면 도로 끝 언덕 위에 정자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주차는 입구 앞 공터를 이용하면 되고, 도보로는 벌교초등학교에서 약 10분 거리입니다. 오르는 길은 완만하고, 양옆으로 벼 이삭이 고개를 숙인 풍경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늦여름의 공기가 약간 눅눅했지만, 정자 앞에 다다르자 바람이 한결 시원했습니다. 길가의 표지판에는 정자의 역사와 보성 지역 유학자들의 모임처로 쓰였던 배경이 적혀 있었습니다. 정자로 향하는 동안 주변이 점점 조용해지며, 마음이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2. 고즈넉한 정자의 구조와 주변 풍경
취송정은 팔작지붕의 단층 목조건물로, 네 면이 개방되어 있습니다. 지붕의 곡선이 부드럽게 이어지고, 기둥은 붉은빛이 도는 소나무로 세워져 있습니다. 마루는 나무결이 살아 있고, 발 아래로 시원한 바람이 스며들었습니다. 정자에 앉으면 남쪽으로는 벌교천이 흐르고, 북쪽으로는 낮은 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습니다. 정자 주위에는 오래된 소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데, 이 나무들 덕분에 ‘취송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나무 그늘 아래에서 들리는 바람소리가 일정한 리듬을 만들어냈고, 정자의 기둥에 새겨진 옛 한자가 햇빛에 반짝였습니다. 단정하면서도 여유로운 공간이었습니다.
3. 정자에 담긴 역사와 정신
취송정은 조선 후기 지역 유학자들이 학문과 시문을 논하던 장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종종 학문 모임이나 제향이 열렸다고 전해집니다. 정자 내부 벽면에는 후대에 걸린 편액이 남아 있으며, ‘청풍명월(淸風明月)’이라는 글귀가 눈에 띄었습니다. 이는 이곳의 풍광과 선비들의 마음가짐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목재의 질감은 세월로 인해 어둡게 변했지만, 구조는 여전히 단단했습니다. 정자의 이름처럼 소나무 향이 공간을 가득 채웠고, 한쪽에 걸린 종이등이 바람에 살짝 흔들렸습니다. 인위적인 장식 없이 오직 단정한 선과 재료의 질감으로 정자의 품격이 드러났습니다.
4. 방문객을 위한 편의와 주변 배려
정자 옆에는 작은 쉼터와 평상이 있어 누구나 자유롭게 쉴 수 있습니다. 여름에는 소나무 그늘이 짙게 드리워 햇볕을 막아줍니다. 안내판에는 취송정의 건립 연도와 주요 보수 시기가 기록되어 있었고, QR코드를 통해 자세한 해설 영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근처에는 간이 화장실이 있으며, 쓰레기통이 정리되어 있어 청결하게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특히 바람이 통하는 방향으로 정자가 지어져 있어, 실내보다 더 시원한 느낌을 줍니다. 들판의 소리, 개울의 물소리, 새의 지저귐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복잡한 생각이 차분히 가라앉았습니다. 잠시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맑아졌습니다.
5. 취송정에서 이어지는 벌교의 여정
취송정을 둘러본 뒤에는 가까운 ‘태백산맥문학관’을 함께 방문하면 좋습니다. 조정래 작가의 소설 세계와 벌교의 역사적 배경을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또한 ‘벌교천 둑길’은 산책로로 정비되어 있어 정자에서 내려와 천천히 걷기 좋습니다. 점심 무렵에는 ‘벌교 꼬막거리’에서 꼬막정식을 맛보며 지역의 풍미를 즐길 수 있습니다. 오후에는 ‘보성차밭’으로 이동해 녹차밭 풍경을 감상하거나, ‘순천만습지’까지 연계하면 하루 일정이 알차게 완성됩니다. 취송정의 고요함과 벌교의 활기, 두 분위기가 대조를 이루면서도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하루를 느리게 보내기에 적당한 코스였습니다.
6. 방문 전 알아두면 좋은 팁
취송정은 연중 개방되어 있으며, 입장료가 없습니다. 방문 시간은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 사이가 적당합니다. 햇빛이 정자 마루에 부드럽게 스며드는 오전이 사진 촬영에 특히 좋습니다. 여름철에는 모기향이나 벌레퇴치제를 챙기면 편리합니다. 정자 내부에서는 신발을 벗고 오르는 것이 예의이며, 음식물 섭취는 제한되어 있습니다. 겨울에는 바람이 강하므로 따뜻한 외투를 준비해야 합니다. 또한 들판길에 가로등이 적어 해 질 무렵 이후의 방문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조용히 머무르며 경관을 즐기는 것이 이곳의 본래 취지에 가장 어울립니다. 오래 머물수록 소나무 향이 짙게 남습니다.
마무리
취송정은 화려함보다 단아함이 빛나는 정자였습니다. 마루에 앉아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옛 선비들이 글을 짓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주변의 논과 하늘, 그리고 소나무가 만들어내는 색의 조화가 절묘했습니다. 정자 아래로 펼쳐진 들판은 계절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줄 듯했습니다. 그 고요한 풍경 속에서 마음이 가볍게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다시 벌교를 찾게 된다면, 해 질 무렵 붉은 노을이 정자 기둥에 스며드는 모습을 꼭 보고 싶습니다. 오랜 시간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품격과 여유를 간직한 공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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