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유천서원 초가을 고요가 스민 단아한 서원 여행
초가을 오후, 남원 주생면의 들녘을 따라 걷다 보니 작은 숲 속에 자리한 고요한 기와지붕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니 ‘유천서원(楡川書院)’이라는 현판이 걸린 대문이 보였습니다. 흙담과 나무가 어우러진 풍경은 단정하면서도 따뜻했습니다. 대문을 지나자 바람이 마루를 스치며 은은한 소리를 냈고, 먼 들판의 풀냄새가 서원 안으로 스며들었습니다. 크지 않은 공간이지만, 오랜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었습니다. 햇살이 처마 끝에서 부드럽게 떨어지며 기둥의 나이테를 비추고, 그 빛이 흙바닥에 닿아 따뜻한 기운을 만들었습니다. 처음 들어선 순간부터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곳이었습니다.
1. 주생면 들녘 끝, 조용히 자리한 서원
유천서원은 남원 시내에서 차로 약 25분 거리, 주생면 유천리의 작은 마을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습니다. 내비게이션을 따라가면 ‘유천서원’ 표지석이 도로 옆에 세워져 있고, 좁은 시멘트길을 따라 200m 정도 들어가면 낮은 담장과 소나무가 서 있는 입구가 보입니다. 주차는 서원 앞 공터에 3대 정도 가능하며, 도로변이 한적해 접근이 편했습니다. 주변은 논과 밭이 이어진 평야지대로, 가을이면 황금빛 벼가 흔들려 한 폭의 풍경화처럼 보입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주생면사무소 정류장에서 하차 후 도보 15분 정도 거리입니다. 길가에 서 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원의 존재를 조용히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2. 단정한 배치와 목조 건축의 조화
유천서원은 전형적인 조선 후기 서원 건축 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정문을 지나면 넓은 마당이 펼쳐지고, 그 뒤로 강학당과 사당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강학당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 규모의 맞배지붕 구조로, 기둥의 간격이 일정해 안정감을 줍니다. 바닥은 나무 마루로 되어 있고, 창호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은은하게 방 안을 밝혔습니다. 사당은 강학당보다 약간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어 공간의 위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단청은 거의 사라졌지만, 나무의 자연색과 지붕의 곡선이 어우러져 한결 따뜻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세월이 만들어낸 단아함이 돋보였습니다.
3. 서원의 설립 배경과 역사적 의미
유천서원은 조선 중기에 지역 유학자들이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남원 지역의 대표적 교육기관 중 하나였습니다. 특히 지역 출신 학자들의 학문적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곳으로, 향촌 자치와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사당에는 학덕이 높았던 선현들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매년 제향이 엄숙하게 거행됩니다. 서원 폐지령 이후 한때 훼손되었으나, 지역 주민들의 노력으로 다시 복원되어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학문의 정신을 이어온 장소로서, 유천서원은 남원 지역의 정신적 중심이자 역사적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4. 자연과 함께 머무는 공간의 품격
서원 주변은 낮은 구릉과 개울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바람이 불면 대청마루 위로 나뭇잎이 흩날리고, 들려오는 새소리와 물소리가 잔잔하게 어우러졌습니다. 마당 한쪽에는 오래된 감나무가 서 있어 가을이면 붉은 열매가 가지마다 매달립니다. 돌담 사이로는 작은 풀꽃이 피어나고, 햇살이 기와 위를 스치며 반짝입니다. 관리가 잘 되어 있어 잡초가 거의 없고, 흙길도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오후가 되면 서원 뒤편의 산자락이 그림자를 드리워 건물 전체가 한층 차분한 분위기로 바뀝니다. 자연과 건축이 경계를 이루지 않고 하나로 이어져 있는 점이 이곳의 가장 큰 매력이었습니다.
5. 인근에서 함께 둘러볼 남원의 명소
유천서원을 둘러본 후에는 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윤영채가옥’을 방문하면 좋습니다. 두 곳 모두 전통 건축의 아름다움을 지닌 공간으로,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생활과 학문 문화를 함께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후 ‘남원향교’로 이동해 지역 교육의 역사적 흐름을 이어보는 것도 좋습니다. 점심은 주생면 중심의 ‘지리산추어탕’에서 따뜻한 식사를 즐기길 추천합니다. 오후에는 ‘광한루원’으로 이동해 정원의 풍경을 감상하며 산책을 마무리하면 하루 일정이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전통문화와 자연, 휴식이 균형을 이루는 여정이었습니다.
6. 관람 팁과 유의사항
유천서원은 상시 개방되어 있으며, 입장료는 없습니다. 다만 제향이 있는 날에는 일부 구역 출입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내부 관람 시에는 신발을 벗고 조용히 머무는 것이 좋으며, 건물 내부의 목재는 손으로 만지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비가 온 뒤에는 마당이 미끄럽기 때문에 운동화를 착용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여름철에는 벌과 모기가 많아 긴 옷차림이 좋으며, 봄과 가을에는 햇살이 부드러워 사진 촬영에 최적의 시기입니다. 오전 10시 이전에 방문하면 햇빛이 건물 정면으로 들어와 가장 따뜻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무리
유천서원은 화려하지 않지만, 단아한 아름다움과 조용한 품격이 공존하는 공간이었습니다. 나무의 향, 바람의 소리, 그리고 햇살의 결이 어우러져 마음이 맑아졌습니다. 오래된 건물 안에 스며든 시간의 결이 선명하게 느껴졌고, 학문과 예의의 정신이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짧은 머무름이었지만, 마음속에 오래 남는 울림이 있었습니다. 다시 찾는다면 봄비가 내린 다음 날, 젖은 흙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이 서원의 고요함을 다시 느끼고 싶습니다. 남원의 전통과 정신이 가장 순수하게 살아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댓글
댓글 쓰기